
사건의 발단은 주인공의 평범한 일상을 깨뜨리고 중심 플롯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사건입니다. 시나리오 작법서에서는 ‘도발적 사건’ 또는 영어 그대로 ‘인사이팅 인시던트(inciting incident)’라고도 부릅니다. 그 전까지 주인공의 세계는 불행할지언정 안정되어 있고, 그 뒤로는 어떻게든 반응해야 합니다. 이야기는 바로 그 반응에 관한 것입니다.
장편 시나리오에서 발단은 보통 전체의 앞쪽 10~15% 안에, 110쪽 초고라면 10~15쪽 무렵에 옵니다. 첫 장면부터 터뜨리는 영화도 있고 한참 뒤로 미루는 영화도 있습니다. 이 개념을 시나리오 작가들에게 널리 알린 사람은 로버트 맥키입니다. 그는 『시나리오 어떻게 쓸 것인가』(원제 Story, 1997)에서 발단을 이야기 전체를 움직이는 첫 번째 큰 사건으로 설명했습니다.
사건의 발단이란
사건의 발단은 중심 갈등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첫 번째 사건입니다. 그저 흥미로운 일이 하나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 전체가 답하게 될 질문을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돈을 되찾을 수 있을까, 아들을 찾을 수 있을까, 오늘 밤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국어 시간에 배운 5단 구성의 ‘발단’이 이야기의 시작 부분 전체를 가리킨다면, 시나리오에서 말하는 발단은 그 시작 안에서 판을 뒤집는 한 순간을 콕 집어 가리킨다는 점이 다릅니다.
진짜 발단과 평범한 플롯 사건을 가르는 특징은 세 가지입니다.
- 균형을 깨뜨립니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주인공의 삶이 기울어, 하던 대로 계속 살 수 없게 됩니다.
- 극적 질문을 던집니다. 이 사건이 지나면 주인공은 몰라도 관객은 이 이야기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압니다.
- 반응을 요구합니다. 첫 반응이 거부라 하더라도 주인공은 어떻게든 움직여야 합니다.
사건의 발단 예시
많은 사람이 본 영화와 드라마에서 고른 예시를 우리 말로 정리했습니다. 각 사건이 나머지 이야기가 답할 질문을 어떻게 심어 두는지 보세요.
- 괴물 (2006): 한강 둔치에 정체 모를 괴물이 나타나 매점집 딸 현서를 끌고 사라집니다. 이 가족이 아이를 되찾을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영화 끝까지 이어집니다.
- 부산행 (2016): 감염된 여자가 출발 직전의 KTX에 몸을 싣습니다. 열차가 달리는 동안 감염이 퍼지고, 석우와 딸 수안이 살아서 부산에 닿을 수 있을지가 영화의 질문이 됩니다.
- 기생충 (2019): 기우의 친구가 찾아와 부잣집 과외 자리를 넘겨줍니다. 아무것도 부서지지 않는 조용한 장면이지만, 기택 가족이 그 집에 발을 들이는 모든 일이 여기서 시작됩니다.
- 오징어 게임 (2021): 빚에 쫓기는 기훈에게 지하철역의 낯선 남자가 딱지치기를 제안하고 명함을 건넵니다. 1화의 작은 놀이 하나가 시리즈 전체의 게임으로 이어집니다.
- 인사이드 아웃 (2015): 열한 살 라일리의 가족이 낯선 도시로 이사합니다. 이사 자체를 발단으로 보는 해석도 있고, 기쁨과 슬픔이 본부에서 밀려나는 순간을 발단으로 보는 해석도 있습니다. 둘 다 같은 질문, 라일리의 마음이 제자리를 찾을 수 있을까를 던집니다.
도발적 사건과 촉매는 다른가
도발적 사건과 촉매는 같은 생각에 붙은 두 개의 이름입니다. 둘 다 주인공을 일상에서 밀어내는 사건을 가리킵니다. ‘촉매(catalyst)’는 블레이크 스나이더의 15비트 시트에서 쓰는 이름으로, 전체의 10% 지점쯤에 놓입니다. ‘사건의 발단’은 맥키와 연극 전통에서 쓰는 이름입니다. 비트 보드에서 3막 구조를 고르면 ‘도발적 사건’, 15비트 시트를 고르면 ‘촉매’라는 이름으로 같은 자리에 나타납니다.
둘을 나눠 쓰는 작가도 있습니다. 이 경우 발단은 이야기의 문제를 일으킨 사건으로,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일어났을 수도 있습니다. 수년 전 저지른 범죄 같은 것입니다. 촉매는 화면 위에서 주인공이 그 문제와 마주치는 순간입니다. 이 구분은 과거 사건이 현재를 움직이는 미스터리나 복수극에서 특히 쓸모가 있습니다.
발단과 1막의 끝은 어떻게 다른가
발단은 문제를 일으키고, 1막의 끝은 주인공이 그 문제를 풀겠다고 뛰어드는 순간입니다. 그 사이에는 저항하고, 고민하고, 준비하는 구간이 있습니다. 오징어 게임 1화에서 딱지치기와 명함이 발단이라면, 기훈이 명함의 번호로 전화를 걸고 승합차에 오르는 것이 1막의 끝에 해당합니다.
이 둘을 헷갈리는 것이 1막이 늘어지는 흔한 원인입니다. 문제가 나타나자마자 주인공이 뛰어들면 1막이 없어지고, 40쪽 동안 고민만 하면 관객이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두 지점의 관계는 3막 구조 가이드에서 더 자세히 다룹니다.
사건의 발단은 어디에 와야 하나
장편 시나리오에서 발단은 보통 처음 10~15쪽 안에, 관객이 무엇이 깨지는지 알 수 있을 만큼의 설정이 끝난 뒤에 옵니다. 정확한 위치는 장르와 속도에 따라 달라집니다.
- 첫 장면: 스릴러, 호러, 콜드 오픈으로 여는 이야기는 사건 자체로 시작하고 일상은 나중에 채워 넣는 경우가 많습니다.
- 10~15쪽 무렵: 장편에서 가장 흔한 위치입니다. 짧게 설정하고, 그다음 깨뜨립니다.
- 20쪽 무렵이나 그 뒤: 느린 드라마는 발단을 미루기도 하지만, 그만큼 설정 구간에 따로 긴장이 있어야 관객이 버팁니다.
-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과거의 사건이 플롯을 움직이고 관객이 그것을 조금씩 알아 가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래도 주인공이 그 과거와 부딪히는 화면 위의 순간은 따로 있어야 합니다.
한국 드라마에서는 1화의 첫 10분 안에 발단을 걸어 두고 1화 엔딩에서 주인공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습니다. 1~3분짜리 숏드라마 한 회라면 첫 대사가 곧 발단일 수도 있습니다.
강한 발단의 조건
- 주인공의 삶의 균형을 좋든 나쁘든 무너뜨려, 하던 대로 살 수 없게 만듭니다.
- 나머지 이야기가 답할 질문을 던집니다. 돈을 되찾을까, 오늘 밤을 살아서 넘길까.
- 이야기의 크기를 정합니다. 잃어버린 강아지와 잃어버린 아이는 전혀 다른 영화를 약속합니다.
- 다른 사람에게 일어난 일처럼 보여도 결국 주인공에게 닥치거나 주인공이 반응하게 만듭니다.
인과적 발단과 우연적 발단
맥키는 발단을 두 가지로 나눕니다. 인과적 발단은 결정입니다. 누군가, 흔히 주인공 자신이 무언가를 하기로 선택해 이야기가 움직입니다. 우연적 발단은 사고입니다. 우연한 만남, 폭풍, 잘못 배달된 편지 같은 것입니다. 둘 다 쓸 수 있지만 느낌이 다릅니다. 인과적 발단은 인물을 처음부터 이야기에 연루시키고, 우연적 발단은 인물을 희생자로 세운 뒤 반응을 통해 무엇으로 만들어진 사람인지 보여 줍니다. 우연에서 시작했다면 그 뒤로는 인물의 선택이 이야기를 끌고 가게 하세요. 우연은 이야기를 시작할 수는 있어도 끝내서는 안 됩니다.
발단은 클라이맥스와 같은가
아닙니다. 발단은 보통 이야기의 앞쪽 10~15% 안에서 중심 갈등을 시작하는 사건이고, 클라이맥스는 끝 무렵에 그 갈등을 해결하는 결정적인 대결입니다. 다만 둘은 짝을 이룹니다. 좋은 클라이맥스는 발단이 던진 질문에 답합니다. 클라이맥스를 써 놓고도 무언가 빠진 느낌이 든다면, 발단으로 돌아가 그 장면이 던진 질문이 마지막에 정말 답해지는지 확인해 보세요.
사건의 발단 쓰는 법
주인공이 가장 깊이 원하는 것이나 가장 두려워하는 것에서 출발해, 바로 그곳을 정면으로 때리는 사건을 설계하세요. 그다음 그 사건을 화면에 보이게, 무시할 수 없게 만드세요.
- 일상을 정합니다. 깨지기 전 주인공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 알고, 나중에 되울릴 수 있는 일상 장면을 하나 보여 주세요.
- 결점을 겨냥합니다. 가장 좋은 발단은 주인공의 가장 약한 곳을 칩니다. 통제하려는 부모는 통제력을 잃고, 혼자가 편한 사람은 누군가를 책임지게 됩니다.
- 구체적이고 눈에 보이게 씁니다. ‘그녀의 삶이 바뀐다’는 장면이 아닙니다. 낯선 사람이 계산대에 현금 가방을 올려놓는 것은 장면입니다.
- 극적 질문을 심습니다. 장면이 끝날 때 관객이 이 이야기가 무엇에 관한 것인지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문장이 곧 로그라인의 뼈대입니다.
- 주인공이 반응하게 합니다. 부정이라도 좋으니 첫 반응을 보여 주세요. 그래야 관객이 사건이 아니라 인물을 봅니다.
아래는 이 페이지를 위해 쓴 대본 예시입니다. 조용한 설정 뒤에 대사 한 줄이 모든 것을 바꿉니다.
.24시 빨래방 - 밤 건조기 한 대만 돌아간다. 순자(60대), 손님이 두고 간 셔츠를 한 장씩 정성껏 갠다. 출입문 종이 울린다. 비에 흠뻑 젖은 여고생, 휴대폰 하나를 카운터에 내려놓는다. @여고생 6번 세탁기 안에 있었어요. 계속 울려요. 순자, 무심히 화면을 본다. 발신자 사진은 몇 년 전, 젊은 날의 순자 자신이다. @순자 (겨우) 우리 아들 전화예요, 이거. 휴대폰이 다시 울린다.
아무것도 폭발하지 않았지만 순자의 평범한 밤은 끝났습니다. 낯선 사람의 빨랫감에서 왜 연락이 끊긴 아들의 휴대폰이 나왔을까라는 질문이 이제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Scenaloom에서 써 보기
Scenaloom의 비트 보드에서 ‘구조로 시작하기’를 고르면 3막 구조, 15비트 시트, 영웅의 여정 중 하나로 시작할 수 있고, 각 비트는 목표 분량에서 보통 차지하는 비율의 자리에 놓입니다. 기본 목표 분량은 110쪽이라 내 발단 장면이 목표 대비 어디쯤 놓이는지 바로 보입니다. 스토리 맵은 목표 분량을 보여 주고, 개요에는 계획을 담으며, 장면 보드에서는 발단 장면을 카드처럼 앞뒤로 옮길 수 있습니다. 개요와 비트 문서를 보거나 새 프로젝트를 시작해 보세요.
자주 묻는 질문
이야기에서 사건의 발단이란 무엇인가요?
주인공의 일상을 깨뜨리고 중심 갈등을 시작하는 사건입니다. 주인공이 반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이야기 전체가 답할 질문을 던집니다. 장편 시나리오에서는 보통 처음 10~15쪽 안에 옵니다.
도발적 사건과 사건의 발단은 같은 말인가요?
네, 같은 개념입니다. 영어 inciting incident를 옮기면서 ‘도발적 사건’, ‘사건의 발단’, ‘인사이팅 인시던트’ 같은 말이 함께 쓰이고 있습니다. 15비트 시트에서는 같은 자리를 ‘촉매’라고 부릅니다.
사건의 발단이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에 일어날 수도 있나요?
그렇습니다. 오래전 범죄처럼 과거의 사건이 이야기를 움직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다만 그때도 주인공이 그 과거와 마주치는 화면 위의 순간이 필요하고, 많은 작가가 그 순간을 발단 또는 촉매로 봅니다.
한 이야기에 발단이 여러 개 있을 수 있나요?
중심 플롯의 발단은 보통 하나지만, 서브플롯마다 자기 발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여러 인물이 끌고 가는 앙상블극이나 드라마 시리즈에서는 인물마다, 회차마다 작은 발단이 따로 놓이기도 합니다.
발단과 클라이맥스는 어떻게 다른가요?
발단은 앞부분에서 갈등을 시작하는 사건이고, 클라이맥스는 끝부분에서 그 갈등을 해결하는 결정적 대결입니다. 좋은 클라이맥스는 발단이 던진 질문에 정면으로 답합니다.